2017-08-04
古隆中冬日游记
고융중 겨울유기
湖北,武侯祠,大雪中的诸葛亮铜像。
호북 양양에 위치한 고융중 무후사에는 대설속의 제갈량 동상이 있다.
等待了整整一个冬季,终于在马年立春之后迎来这场大雪。
한 겨울철을 내내 기다려서야 겨우내 말해인 입춘 후의 이번 대설을 맞이하게 되였다.
头一天晚上睡觉前特意把闹钟定在了六点。
전날 밤 잠들기 전에 별도로 알람을 6시에 맞추어 놓았던것이다.
立春之后,雪花铺在地上保留时间通常不会太长,随着气温的升高,一般临近中午就会融化。
입춘후 땅에 떨어진 눈들은 장시간 버티지 못하고 기온의 상승으로 인해 통상적으로 점심쯤이면 녹아버리군 한다.
从市区到有十四、五公里路程。因此,要想拍到无人踩踏的雪景,必须得早起赶在大批游客蜂拥而来之前到达。
시내에서 고융중까지는 14~15킬로미터의 거리이기때문에 발자국이 없는 설경을 사진에 담으려면 반드시 일찌기 일어나 관광객들이 도착하기 전 먼저 가야 한다.
上一次拍到雪景已经是两年前的事了。现在的雪已是越来越难得盼到。
전번 고융중 설경을 촬영하였던 때가 이미 2년전의 일이였다. 현재에 들어서서 눈은 점점 만나기 힘든 일이였다.
“龙卧处,吟声无绝。只为惊天震地平天下,虽羽折而往矣”,在漫天的雪花飞舞之中,我第一个走进。经隆中牌坊、躬耕地、小虹桥、卧龙处……,脑子里尽是刘玄德三顾茅庐,煮酒隆中对的情景。
“용와처, 음성무절.지위경천진지평천하, 수우절이왕의(龙卧处,吟声无绝。只为惊天震地平天下,虽羽折而往矣)”, 온 하늘에 눈꽃이 휘날리는 때에 나는 제일 처음으로 고융중에 들어서게 되였다. 룡 중의 패방, 궁경지, 소홍교, 와룡처…… 를 지나면서 머리속에는 유현덕이 삼고초려하여 술을 마시며 융중대 하던 정경이 떠오른다.
公元207年,刘备为了兴复汉室,三顾草庐以求天下大计。诸葛亮感激刘备三顾之恩,辅佐刘备开创蜀汉基业。
서기 207년, 유비는 한실의 부흥을 위하여 삼고초려하여 천하 대계를 모의하였다. 제갈량은 유비의 삼고초려 은혜에 감격하여 유비를 보필하여 서한기업을 일떠세우게 되였다.
罗贯中在《三国演义》第三十七回中这样描述道:“孔明当世大贤,岂可召乎!遂上马再往访孔明。关、张亦乘马相随。时值隆冬,天气严寒,彤云密布。行无数里,忽然朔风凛凛,瑞雪霏霏:山如玉簇,林似银妆……”。
라관중은 <삼국연의> 제37회에서 이렇게 묘사하였다. “공명당세대현, 기가소호! 수상마재왕방공명. 관,장역승마상수. 시치륭동, 천기엄한, 동운밀포. 행무수리, 홀연삭풍름름, 서설비비: 산여옥족, 림사은장(孔明当世大贤,岂可召乎!遂上马再往访孔明。关、张亦乘马相随。时值隆冬,天气严寒,彤云密布。行无数里,忽然朔风凛凛,瑞雪霏霏:山如玉簇,林似银妆)……”.
景区改造后,隆中大门已经前移至湖北文理学院南门处。
관광구 개조후 융중의 대문은 이미 호북문리학원의 남문쪽으로 옴겨졌다.
改造时被拆掉差点挪位的牌坊。牌坊建于清光绪十九年(公元1893年),是隆中的标志性建筑。牌坊中间字碑雕刻“澹泊明志,宁静致远”,此联出自诸葛亮《诫子书》。
개조시 하마트면 철거하면서 자리를 옮길뻔한 고융중패방. 고융중패방은 청광서 19년(서원 1893년)에 건축된 룡중의 상징적인 건축물이다. 패방 가운데 자비에는 “담박하지 않으면 뜻이 밝지 못하고, 고요하지 않으면 멀리 생각할 수 없다”는 글이 새겨져 있는데 이는 제갈량의 <계자서>에서 온 것이다.
“”石牌坊高约六米,长约十米,其建造材料为青石开榫组装而成,依外观形式为柱不出头有楼,四柱三牌楼式,为清光绪十九年(公元1893年)湖北提督程文炳所建。
“고융중”석패방의 높이는 약 6미터, 길이는 약 10미터이며 사용된 건축자재는 청석을 갂아 조립된것으로 외관상으로는 “주부출두유루, 사주삼패루”식인 청광서 19년(서원 1893년)에 호북 제도 정문병이 세운것이다.
在牌坊背面的字碑上刻着“三代下一人”,作者陈维周,清安襄陨荆兵备使者,此匾所题镇雄为地名,属云南所辖,后学是歉词,意即后辈学生。“三代下一人”意指诸葛亮是夏、商、周以后的第一人杰。
패방의 뒤면 자패에는 “삼대하일인”이란 글이 새겨져 있는데 작자 진유주는 청안양운형병비사자이며 이 편액중의 “진웅”은 지명으로 운남에 속하고 “후학”은 겸손한 단어로 뜻인즉 후배학생임을 말한다. “삼대하일인”이란 바로 제갈량이 하, 상, 주 이후의 제일 뛰여난 인물이란 뜻이다.
门柱上雕刻“伯仲之间见伊吕;指挥若定失萧曹。”此联选自杜甫于唐代宗大历元年(公元766年)初夏到菱洲(今四川奉节)期间写的《咏怀古迹五首》之五中的诗句。对联在此称颂诸葛亮的文韬武略与伊尹(商汤佐臣)、吕尚(周代齐国始祖,俗称姜太公)不相上下,指挥调度从容镇定连萧何(西汉第一任臣相)、曹参(西汉大臣,曾任齐相9年,后继萧何为汉惠帝臣相)与之相比都显得逊色。
문기둥에는 “백중지간견이려; 지휘약정실소조.”라 새겨져 있는데 이는 두보가 당대종 대력원년(서기 766년) 초여름 릉주(오늘날 사천 봉절)에 다녀왔던 기간에 쓴 <영회고적5수> 5중의 시구이다. 시구에서는 제갈량의 군사적책략이 이윤(상탕좌신), 여상(주대제국시조,강태공의 속칭)과도 막상막하이고 지휘와 조달이 여유있고 차분함이 소하(서한 제1임 승상), 조참(서한 대신, 제상에 9년간 임하다가 소하를 이어 한혜제 승상을 맡았음)도 따를수 없음을 칭송하고 있다.
过牌坊,以前的一池荷塘已经变成池塘,雪花飘落在冰面上,瞬间融入水中,与远处的躬耕田潺潺相连。
패방을 지나면 예전의 연못은 이미 단순 못으로 변하였고 눈꽃이 얼음위에 내려앉자마자 녹으면서 물속에 섞여 저 먼곳의 궁경전에 졸졸 흘러들어간다.
往年盛夏,常在这里拍摄荷花,不知道今年还能在此拍得否~
왕년의 여름철에는 늘 이곳에서 연꽃을 사진속에 담을수 있었는데 올해에도 역시 사진속에 담을수 있을런지?
寒梅映衬中的小虹桥。关于小虹桥,罗贯中在《三国演义》中对其这样写道:刘备冒大风雪第二次到隆中拜访诸葛亮时,与诸葛亮的岳父黄承彦在此桥相遇。当时黄承彦触景生情,雅兴勃发,正高吟:“骑驴过小桥,独叹梅花瘦”。因在小虹桥处发生了这段趣事,且其为诸葛亮寓居隆中期间经常出入之门户,所以,小虹桥便一直作为隆中诸葛故迹的一个景点,为后人所珍视。
겨울매화 속 소홍교. 소홍교에 관하여 라관중은 <삼국연의>에서 이렇게 묘사하였다. 유비가 큰 눈을 무릅쓰고 두번째로 융중에 제갈량을 찾아왔을 때 제갈량의 장인 황승연과 이 다리에서 만났다. 그때 마침 황승연은 절경에 취하여 흥에 돋쳐 높은 소리로 “기려과소교, 독탄매화수(骑驴过小桥,独叹梅花瘦)” 읊조리고 있었다. 소홍교에서 이런 재미난 이야기가 있었고 또한 제갈향이 거주하던 기간 자주 드나들던 출입구였기에 소횽교는 줄곳 융중 제갈 고적의 한 관광지로 후인들이 소중히 여기게 되였다.
明弘治二年,明朝住持大云和尚曾募捐修此桥。《造小虹桥碑》描述当时的小虹桥为:“雨霁长空横素影,云收大地露真形,水从半月溪边过,人在苍龙背上行。”后小拱桥朽坏,改为青石板桥。
명홍치2년(明弘治二年), 명조 광덕사 주지(明朝住持) 대운승려가 모금하여 이 다리를 수리하였다. <조소홍교비>는 당시 소홍교를 “우제장공횡소영,운수대지로진형,수종반월계변과, 인재창룡배상행 (雨霁长空横素影,云收大地露真形,水从半月溪边过,人在苍龙背上行.)”로 묘사되였으며 후에 아치형다리가 부식노화되여 청석판교로 교체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