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8-04
山不高而秀雅,水不深而澄清,地不广而平坦,林不大而茂盛.罗贯中在<<三国演义>>第三十七回中如是描写古隆中.
산은 높지 않으나 수려하고, 물은 깊지 않으나 깨끗하며, 땅은 넓지 않으나 평탄하며, 림은 크지 않으나 무성하구나. (山不高而秀雅,水不深而澄清,地不广而平坦,林不大而茂盛) 라관중(罗贯中)은 <삼국연의 (三国演义)> 제37회에서 이렇게 고융중(古隆中)을 묘사하였다.
一千多年来,古隆中令人神往,谁不想目睹诸葛亮"躬耕垄亩"的田园风光,谁不想重温"刘玄德三顾草庐"的动人故事,谁不想倾听孔明未出茅庐先分天下的精彩"隆中对".
천여년동안 고융중(古隆中)은 사람들로 하여끔 마음이 끌리게 하였고 누구나 제갈량의 “궁경롱묘(躬耕垄亩)” 전원풍경을 보고싶고 “유현덕삼고초려(刘玄德三顾草庐)”의 감격스러운 이야기를 되새기고 싶고 공명(孔明)이 초려(茅庐)를 나서기전에 우선 천하를 나누던 멋진 “융중대(隆中对)”를 듣고 싶어한다.
2008年10月16日,一个晴朗的日子,我们一早离开南湖宾馆,乘13路到十字街,再转乘从火车站到古隆中的512路,到了终点站,离景区还有一小段上坡路,为了节省时间,又搭乘一辆三轮摩托车,很快到达景区大门.门票每人60元.
2008년10월16일, 맑은 날씨에 우리 일행은 아침 일찍 남호호텔(南湖宾馆)을 나서서 13번 뻐스를 타고 십자가(十字街)에 도착해서 기차역에서 고융중(古隆中)으로 향하는 512번 뻐스를 환승하여 종점역에 도착하니 관광구와 약간의 오르막길만 남았다. 우리는 시간을 절약하기 위하여 삼륜 오토바이를 갈아타니 금방 관광구 정문쪽에 도착하게 되였다. 입장료는 1인당 60위엔이였다.
一. "三顾频频天下计,两朝开济老臣心"--古隆中牌坊
1. “삼고빈빈천하계,양조개제노신심(三顾频频天下计,两朝开济老臣心)”—고융중패방(古隆中牌坊)
进入景区,山清水秀,风景宜人.走在游路上,敬仰之情油然而生.首先看到的是古隆中牌坊.绿树红花中的牌坊,更显庄重.这个高约10米,长约6米的石制牌坊,建于清光绪十九年(1893年),横额上三个红色大字"古隆中"尤为引人注目.两边刻有杜甫的诗句"三顾频频天下计,两朝开济老臣心".
관광구에 들어서니 산수가 아름답고 풍경이 유혹적이다. 관광길에 들어서니 저절로 경모감이 든다. 우선 만나보게 된것은 고융중의 패방이다. 녹음과 붉은 꽃들속의 패방은 더우기 위엄을 느끼게 하였으며 높이가 약 10미터, 길이가 약 6미터인 석제 패방(石制牌坊)은 청광서(清光绪) 19년(1893년)에 지어졌으며 현판(横额)에 새겨진 커다란 붉은 세글자 “고융중(古隆中)”이 유난히 눈에 띄이며 양측에는 두보(杜甫)의 시구 “삼고빈빈천하계, 양조개제노신심(三顾频频天下计,两朝开济老臣心)”가 새겨져 있다.
二. "亮躬耕垄亩,好为<<梁父吟>>"--躬耕垄亩处
2. “양궁경롱묘, 호위<량부음>(亮躬耕垄亩,好为<<梁父吟>>)”—궁경룽묘처(躬耕垄亩处)
穿过牌坊,在林荫道上行进,不久眼前出现一片田地.近处的土地似已翻耕种作,远处的绿油油一片.这里就是诸葛亮隐居十年耕田种地的地方.他在<<出师表>>中说自己"臣本布衣,躬耕于南阳".陈寿在<<三国志>>中也说:"亮躬耕垄亩,好为<<梁父吟>>."
패방을 지나 가로수가 우거진 길을 따라 오르면 얼마 안가서 눈앞에는 논밭이 펼쳐져 있다. 근처의 밭들은 금방 밭갈고 씨를 뿌른듯 하나 먼곳의 밭들은 이미 온통 푸르러 있다. 이곳이 바로 제갈량이 십여년 은거하면서 밭갈고 농사짓던 곳이다. 그는 <출사표(出师表)> 에서 자신이 “신본포의, 궁경우남양 (臣本布衣,躬耕于)”이라고 말하였다. 진수(陈寿)도 <삼국지(三国志)>에서 “양궁경롱묘, 호위<량부음> (亮躬耕垄亩,好为<<梁父吟>>)” 라 말하였다.
为了纪念这位名人,景区在田地旁边建立了小亭,中间立一石碑,上书"躬耕垄亩".
이 명인을 기념하기 위하여 관광구에서는 밭의 옆에 작은 정자를 짓고 가운데에 석비를 세우고 그 위에 “궁경룽묘(躬耕垄亩)”라 써놓았다.
当年诸葛亮隐居隆中,一边"躬耕垄亩",一边关注天下大事,待时机成熟,一展鸿鹄大志.正如<<三国演义>>写诸葛均所唱:"凤翱翔于千仞兮,非梧不栖;士伏处于一方兮,非主不依.乐躬耕于垄亩兮,吾爱吾庐;聊寄傲于琴书兮,以待天时."这正是诸葛亮的心声.
그 당시 제갈량이 융중(隆中)에 은거하고 있을때 한편으로는 “궁경룽묘(躬耕垄亩)”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천하대사를 유의하면서 시기가 무르익자 큰 뜻을 이룬다. <삼국연의(三国演义)>에서 묘사한 "봉고상우천인혜, 비오불서; 사복처우일방혜, 비주불의, 락궁경우롱묘혜, 오애오려; 료기오우금서혜, 이대천시(凤翱翔于千仞兮,非梧不栖;士伏处于一方兮,非主不依.乐躬耕于垄亩兮,吾爱吾庐;聊寄傲于琴书兮,以待天时)"가 바로 제갈량의 마음속 말들이다.
三. "骑驴过小桥,独叹梅花瘦"--小虹桥
3. “기려과소교, 독탄매화수(骑驴过小桥,独叹梅花瘦)”—소홍교(小虹桥)
<<三国演义>>描写刘备二顾茅庐,误把诸葛亮的岳父黄承彦当作诸葛亮,多次写到"小桥":"玄德视之,见小桥之西,一人暖帽遮头......转过小桥,口吟诗一首.""老夫在小婿家观梁父吟,记得这一篇;适过小桥,偶见篱落间梅花,故感而诵之."
<삼국연의(三国演义)>에서는 유비(刘备)가 두번째로 초려(茅庐)를 찾았을때 제갈량의 장인 황승언(黄承彦)을 제갈량으로 잘못보고 여러번이나 “소교(小桥)”에서 “현덕(玄德)가 소교서쪽에 한 사람이 따스한 모자로 얼굴을 가리고…… 소교를 지나며 입속으로 시 한수를 읊노라”, “노자가 사위집에서 <양부음(梁父吟)>을 보고 그것을 기억하였다가 마침 소교를 지나다가 울타리사이에 떨어진 매화들을 우연히 보고 감회가 새로워 읊조렸노라”고 묘사하고 있다.
从"躬耕垄亩"向右转去,走不多远,便见一石桥,古朴坚固,横跨小溪之上,这就是小虹桥.当年诸葛亮出入隆中必经此桥,想必<<三国演义>>所写的"小桥"也便是这小虹桥了.
“궁경룽묘(躬耕垄亩)”에서 오른쪽으로 돌아 얼마 안가면 옛스럽고 견고하게 작은 내울물위에 걸쳐 있는 한 돌다리를 만날수 있는데 이것이 바로 소홍교(小虹桥)이다. 당시 제갈량이 융중(隆中)을 드나들때 반드시 이 다리를 거쳐야 했다. <삼국연의 (三国演义)>에 씌여진 “소교(小桥)”가 바로 이 소홍교(小虹桥)이다.
四. "孔明独观其大略.尝抱膝长吟"--抱膝亭
4. “공명독관기대략, 상포슬장음(孔明独观其大略.尝抱膝长吟)”—포슬정(抱膝亭)
<<三国演义>>描写诸葛亮与崔州平,石广元,孟威公,徐元直四人为密友."尝抱膝长吟,而指四人曰:'公等仕进可至刺史,郡守.'众问孔明之志若何,孔明但笑而不答.每常自比管仲,乐毅,其才不可量也."
<삼국연의(三国演义)>에서는 제갈량이 최주평(崔州平), 석광원(石广元), 맹위공(孟威公), 서원직(徐元直) 이 네사람과 딱친구이며 “늘 무릅을 감싸앉고 네명에게 너희들은 자사(刺史), 군수(郡守)로 될수 있다고 하였고 여럿이 공명에게 포부가 무엇이냐고 물었으나 공명은 웃음만 머금고 대답이 없고 매번 자신을 관중(管仲), 악의(乐毅)와 비겼는데 그 재능이 가늠할수 없었다.”